힘들었던 과거는 아름답다

2012.03.22 22:20

mumunsaadmin 조회 수:17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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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156
제목 : 힘들었던 과거는 아름답다
이름 : 각산()
등록일 : 2005년 09월 07일    조회수 :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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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긴 세월 살아가면서 이런 일 저런 일을 많이 겪는다.  그중에 많은 부분은 잊어버리고 또 어떤 일은 머리에서 영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즐겁고 좋았던 기억 보다는 어렵고 힘들었던 일이 더욱 머리에 오래 남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힘들었던 일들이 오히려 먼 훗날엔 아름답게 기억되기도 한다.

  오래전  막내아들이 태어나던 무렵의 일이다. 
그때는 내가 시에틀에 있는 보잉 항공회사에 근무를 했었다.  그 때는 회사에 다녀도 직원들이 가입한 보험의 혜택이 지금만큼 많지 않았다.  병이 날 때에 한해서 치료비는 주지만, 병이 아닌 신체검사나 아이를 분만 했을 때의 비용은 제외 됐었다.  그때의 우리 집 형편은 내가 신입사원인데다가 한국에서 두 아이를 데려 왔고, 집도 새로 구입했을 때라 생활이 빠듯하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때가 비행기 삯도 지금보다 비싸서 편도 항공료가 서울서 시에틀 까지 1200불이나 하던 때였다.  집 사람이 막내를 가졌을 때, 매달 병원에 진단을 받으러 갈 때의 비용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출산 후에 의사비용과 병원비가 그때 돈으로 내 여섯 달 수입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미리 모든 것을 준비해 놓고 아이를 낳는 사람은 별문제가 없겠지만, 우리는 어느 정도 준비를 해놓았지만 그래도 역부족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정부에서 보조금이 나온다.  나도 부자가 못되니 보조금을 신청하려 했으나 보조금 받기에는 수입이 약간 많고 빈민 대상은 아니니 돈벌이를 하는 사람으로는 최하위였다.  나는 몇 푼 안 되는 수입차이로 병원비용 전액을 부담하게 되었다.  봉금 여섯 달치의 병원비를 갚으려면 조금씩 갚는다 해도 수입이 넉넉지 못하니 갚을 일이 아득했다.  그래서 밤일을 하나 찾은 것이 일본 음식점의 접시닦이였다.  마침 그곳에 일하는 한국 아주머니가 있어 소개로 들어갔는데 그 아주머니는 이곳 대학의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나이든 학생의 부인이었고 마침 우리와는 종씨라 가까이 지내고 있던 터였다.  물론 식당 측에는 나도 이곳 대학에 다니는 학생이라고 말해 두었다.

  자랄 때나 어른이 되어서도 노동일 이라고는 해 본 일이 없던 내가 회사에서 퇴근하면 곧바로 식당으로 출근을 해 자정이 넘을 때까지 일을 했다.  접시만 닦는 것이 아니고 음식 만드는 그릇이며 냄비 등 자질구레한 그릇들을 모두 닦아야 했고 부엌 청소도 했다.  이런 것들이 명색이 접시닦이들이 해야 할 일들이었다.  일이 익숙지 않아 그릇을 다루는 것부터가 서툴러 처음에는 꾀나 야단도 맞고 별로 듣기 좋지 않은 욕도 많이 얻어먹었다.  이렇게 한 일 년이 지나 일도 익숙해지고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는 일도 솔선해서 하게 되고 하여 식당에서 좋아 하게 될 무렵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모르나 내가 이곳 대학의 유학생이 아니고 보잉 항공기 회사의 엔지니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식당 부엌에서 일 하는 사람들과 주방장까지 모두 여태까지 나를 냉대 한 것을 미안해하고 이런 곳에서 이런 일하지 않아도 될 텐데 왜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나의 또 다른 직업이나 배움으로 해서 나의 대우가 달라지는 것이 씁쓸했지만, 난 그들이 비단 나의 그런 직업이나 학벌로 내게 다른 대우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 동안 내가 참고 제일 밑바닥 일을 열심히 한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일이 숙달되어 아무리 장시간을 일해도 고단하지 않고 오히려 재미까지 날 지경이 되었고, 늦게까지 뒤치다꺼리를 하고 집에 돌아가면 보통 새벽 한 시를 넘을 정도로 내가 이 식당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계속 이렇게 일 하는 것이 따로 운동을 하러 다니지 않아도 운동이 되서 좋고, 작은 액수지만 생활에 보탬이 되어 좋다고 했다.  차마 병원비등의 자세한 사정을 솔찍히 털어 놓을 수가 없었다.  주방장과 식당 종업원들이 과거에 나에게 무례하게 대한 것에 대해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고 나에게 참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까지 해주니 오히려 내가 송구스러웠다.
 
   그 뒤로는 주방장이 그날 손님들이 주문한 제일 값지고 맛있는 음식 중에서 일부를 따로 두었다가 늦게 저녁을 먹을 때면 나에게 줬다.  이렇게 일하면서 존경까지 받으니 세상에 하잘것없는 것으로 보는 접시닦이 일도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물론 병원비도 빨리 갚을 수가 있었다.  이 일은 그 병원 빚을 갚은 후 시에틀을 떠나 미시간으로 이사를 오게  되면서 그만 두게 되었는데 나는 그곳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물론이요 선물까지 받았다.  아마 이년 이상은 일을 했던 것 같다.

  그 식당을 다닐 때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우리가 사는 앞집에 나이가 많은 미국 할머니가 살고 있었는데 그 할머니는 미장원에 가거나 가게에 장 보러 가는 일이 고작이었다.  무료한 할머니는 매일 창 너머로 우리 집을 엿보곤 했는데 여자 혼자서 아이 넷을 돌보며 고생을 하는데 아이 아버지는 저녁이면 보이지 않는 것이 괘씸한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집사람에게 물어봐도 말 하지 않고, 가끔 주말에 나를 만나 이야기해도 그저 웃기만 하니 몹시 궁금한 나머지 그 할머니는 자기가 돈을 들여 탐정을 고용해서 내 뒤를 밟게 했고 결국 내가 무슨 일을 하느라고 집을 그렇게 비웠는지를 알게 되었다.  할머니는 친척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늘 잘해 주었다.  이 사실을 안 할머니는 자기가 오해를 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며 날보고 착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우리가 시에틀을 떠날 때에는 눈물까지 흘리며 헤어짐을 서운해 했다.

  우리의 인생에는 늘 불행과 행복이 교차한다.  그중 어려운 시기는 견디기가 쉽지 않지만 잘 견디어 내기만 한다면 이렇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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