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과 사의 기로에 선 사람들의

2012.03.22 22:16

mumunsaadmin 조회 수:17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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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140
제목 : 생과 사의 기로에 선 사람들의
이름 : 法雲(도령)()
등록일 : 2005년 05월 29일    조회수 : 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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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사의 기로에 선 사람들을 위한 보금자리 `정토마을`

아름다운 마지막을 위한 이승과 저승의 간이역
생과 사의 기로에 선 사람들을 위한 보금자리 `정토마을`
임윤수(zzzohmy)기자

누구나 다 그런 생각을 한번쯤 해 봤겠지만 저 역시 글을 쓸 때마다 멋지고 맛난 글을 쓰고 싶어집니다. 슬픈 이야기를 쓰면 읽던 사람이 눈물 뚝뚝 흘리다 헉헉 흐느끼는 그런 감정이 전달되고, 맛난 음식 이야길 쓰면 읽던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군침을 꿀꺽 삼키는 그런 글을 말입니다.
▲ 정토마을은 생과 사의 기로에선 사람들이 잠시 쉬었다 가는 이승과 저승의 간이역 같은 곳입니다. ⓒ2004  임윤수

사랑 이야길 쓰면 읽는 이의 가슴에 콩닥거리는 설렘이 생기고 행복한 이야길 쓰면 읽던 사람이 뭔가에 취한 듯 황홀경에 푹 빠져 버리는 글. 어느 풍경을 묘사하면 눈에 보이듯 그 풍경이 선하게 떠오르는 그런 멋지고도 맛난 글을 쓰고 싶습니다.

지금 저는 제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낀 이야길 하려 하는데 영 서툰 글 솜씨라 느낌을 고스란히 전할 자신이 없고 도리어 누가 될까 이렇게 서설이 길어집니다. 지난 일요일(18일) 다녀온 생과 사의 기로에 선 사람들이 잠시 머물고 있는 이승과 저승의 간이역 같은 정토마을 이야길 하려 합니다.

▲ 여느 절들과는 달리 정토마을 입구엔 석등을 세웠습니다. 잠시 머물다 가실 손님들 마음에 진리의 등불이 밝혀지길 소원하는 또 다른 염원인 듯합니다.

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동화 속에 나오던 호랑이가 무섭고 마귀 할멈이 무섭습니까? 조폭이 무섭고 가난이 무섭습니까. 아니면 동네 입구에 있던 공동 묘지가 무섭고 혼자 걸어야 하는 밤길이 무섭습니까. 그러고 보니 세상엔 무서운 게 참 많습니다.

그러나 동서고금,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궁극적으로 제일 무서워하는 건 역시 `죽음` 아닌가 합니다. 떵떵거리는 권세로 천하를 호령하던 권력가도 죽음 앞에선 언제 그랬냐는 듯 체면이고 뭐고 다 집어치고 소위 개 떨듯 벌벌 떨며 "목숨만 살려 달라" 애원합니다.

▲ 정토마을에도 화사한 봄은 찾아왔습니다. 흰색의 야트막한 울타리에서 간병이 이루어는 공간임을 예견할 수 있습니다.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돈을 모으고 고대광실 대궐 같은 집에 살며 남을 위해서라면 구린 동전 한 닢 내놓지 않던 수전노, 돈 없는 이웃 사람 보길 개떡 같이 보고 발가락 때만치도 여기지 않으며 업신여김에 거드름만 피던 부잣집 주인장도 강도를 만나 칼이라도 목에 들어오면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모든 재산 다 내놓을 테니 목숨만 살려 달라"며 목숨 구걸을 합니다.

누구도 경험해 보지 않은 게 죽음이기에 죽음 자체가 그토록 애원하며 구걸할 만큼 고통스런 건지를 아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도대체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죽음이라는 걸 그토록 무서워하는 걸까요?
 
사람은 뭔가를 잃게 되면 많이 속상해 하고 괴로워합니다. 괴로움이란 곧 고통입니다. 작은 돈을 잃어도 괴롭고 건강을 잃어도 괴롭습니다. 명예를 잃어도 괴롭고 직장을 잃어도 괴롭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도 괴롭고 친구를 잃어도 괴롭습니다. 여하튼 사람이 소유하거나 관계하게 되는 사소한 뭔가를 잃는다는 그 자체는 괴로움이며 고통입니다.

▲ 마당으로 들어서는 출입문엔 여느 절들의 사천왕이나 금강장사를 대신해 속세의 모든 번뇌를 털고 가라는 듯 대형 108염주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죽음이라는 건 인간 자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걸 일순간에 깡그리 잃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란 `잃는 데서 오는 괴로움과 고통이 한꺼번에 닥치`는 걸 의미합니다. 그렇게 한꺼번에 쏟아지는 고통과 괴로움이 너무 크다는 걸 사람들은 잠재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죽음을 그토록 무서워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심오한 철학을 들먹이며 그럴싸한 다른 근거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여러 이유들을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모든 걸 한꺼번에 잃는 데서 오는 괴로움과 고통이 두렵기 때문에 죽음을 무서워한다는 걸 한마디로 부정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조심스럽게 드리는 말씀이지만 일단 이 세상에 태어난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게 바로 죽음입니다. 그러기에 죽음은 그렇게 두려워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생활하다 의연하게 맞아들이면 되는 그런 과정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실제는 그렇질 못합니다.

분별없이 무서워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죽음의 실체를 한마디로 정의할 순 없지만 사람의 일생에 있어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는 분명한 현상임에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고 막연하게 맞아들이려 합니다. 그러다 보니 미로처럼 공연한 두려움과 공포감으로 다가와 그 허상에 사로잡히는 게 바로 죽음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확언은 할 수 없지만 죽음을 미리 연습하고 준비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듯합니다. 죽음을 연습하고 준비한다는 게 우습게 들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도 가능한 연습이며 준비라 생각됩니다. 연습과 준비란 게 딴 게 아닙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모든 걸 한꺼번에 깡그리 잃게 됨에서 오는 것을 인정한다면 한꺼번에 잃을 게 없도록 미리 모든 걸 나눠주고 베푸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가진 게 별로 없어 많은 걸 비워둔 성직자 같은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 그토록 무서워하는 죽음마저도 의연하게 맞아들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 정토마을에서 잠시 쉬고 계신 분들이 한번쯤은 혼자의 힘으로 또박또박 걷고싶은 돌길일지도 모릅니다.

표현은 쉽지만 실제는 그렇게 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에 많은 사람들은 잠재적으로 죽음을 무서워하며 공포 속에 죽음 자체를 맞게 됩니다. 말로는 마음을 비웠다고 하지만 그것은 말뿐일 뿐 속내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한 평생 살아가며 이런저런 `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기에 복 타령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인간이 누리는 복에는 자식 복, 재물 복, 남편 복, 처 복 등, 이런 복 저런 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보면 이런 복들은 당시엔 꼭 필요하고 소중한 것들이지만 일생을 마치는 단계에서 본다면 한낱 살아가는 과정에 필요한 소비적 복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한평생을 살다 생을 마감하며 가장 절실하게 갈구하는 것은 역시 `죽음 복`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죽음 복`이란 말을 쓰니 고약하게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건강하게 살다 잠자듯 죽는 것`과 `살아있는 그 자체가 고통스럽도록 심한 통증의 공포 속에 삶을 살다 죽는 것`중 어느 것이 더 복 받은 죽음입니까. 누군가와 항상 함께 한다는 동행의 심리에서 맞게 되는 죽음과 머리가 돌아버릴 만큼 처절한 외로움 끝에 맞게 되는 죽음 중 어느 죽음이 더 복 받은 죽음입니까. 누구도 후자의 죽음을 더 복된 죽음이라고 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누리는 복이란 게 생각대로 욕심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기에 살아생전 복 짓기를 위해 봉사 활동을 하고 자선을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자선 활동을 하고 봉사 활동을 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은 너무 많습니다. 이런 분들이야말로 절 마당 석등처럼 사회를 밝게 하는 등불이며 진리를 전파하는 자비의 실천가들입니다.

`봉사`와 `자선` 그리고 `자비`에 순위를 매기고 경중을 가릴 순 없지만 그 자체가 너무 고귀하고 거룩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덜어주고 고통을 걷어주며 영혼의 평온함을 나누어주는 호스피스들입니다. 어찌 보면 호스피스들은 사람의 일생에 있어 마지막으로 꼭 필요한 `죽음 복`을 누군가에게 만들어 주고 일궈주는 `복 짓기의 전령`들입니다.

▲ 돌길 따라 들어가면 법당에 계신 부처님을 참배할 수 있었습니다. 부처님이 입고 계신 가사가 참 곱습니다.

늙거나 병들어 죽음에 직면한다는 것도 무섭도록 힘든 것이지만 혼자 있어야 하는 외로움에서 오는 소외감 또한 죽음 만큼이나 괴롭고 무서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젊어서의 혼자는 `즐길 수 있는 고독`이 될지 모르지만 병들고 늙어서 혼자는 `소외감이며 고통`입니다.

친부모도 아니고 피붙이도 아닌 생면부지의 사람들. 오랜 병상 생활로 뭉그러질 정도의 욕창이 생긴 사람들. 죽음이 확정되어 휑한 눈에 생기라곤 하나도 없는 혈색을 가진 사람들.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전이될 듯 고통스러워하는,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몸과 영혼을 조금씩 나누어주는 순수한 후원자들과 호스피스들의 거룩한 사랑으로 운영되고 있는 마을이 바로 정토마을입니다. 

증평에서 청주로 가다보면 탄산수로 유명한 초정약수로 들어가는 511번 지방도로와 연결됩니다. 이 도로를 따라 미원 방향으로 가다 제법 가파른 이티재를 넘으면 얼마 멀지 않게 좌측으로 `대신휴게소`가 나옵니다. 이 휴게소 좌측으로 있는 둥 마는 둥, 숨어 있듯 차 한대 겨우 들어갈 너비의 길이 있으니 이 길을 따라 200~300m 들어가면 정토마을이 있습니다. 

▲ 정토마을 손님들이 잠시 쉬기도 하는 휴게실 겸 사무실 냉장고엔 여러 장의 사진이 붙어있었습니다. 사진 속의 밝은 웃음이 서럽게 느껴집니다. </font>

정토마을은 죽음을 목전에 둔 임종 직전의 `암 말기 환자`들, 정말 생과 사의 기로에 서있는 사람들이 죽음으로 들기 전에 잠시 머무는 이승과 저승이 연결되는 간이역 같은 곳입니다. 15병상 규모에 종교와 신분, 지역과 성별에 관계없이 병상이 허락하는 한 경제적 부담 없이 누구나 손님이 될 수 있는 그런 간이역 같은 곳입니다.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는 장소는 다양합니다. 평생을 생활하던 안방일수도 있고 시설이 잘된 병원이나 또 다른 시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안방, 병원 또 다른 시설 그 어느 곳도 죽음만을 위해 준비되었고 운영되는 곳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칫 신성하고 엄숙해야 할 죽음이란 것을 경망 없이 맞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정토마을은 기본적으로 남은 생명이 3개월 안팎인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조심스럽게 병실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양지 쪽으로 옮겨준 휠체어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계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정토마을 손님 중에선 아주 건강한 모습을 보이는 분이라고 하셨지만 안색에서 건강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겨우겨우 부축 받으며 힘겹게 거동하시는 분이 계신가 하면 정말 숨만 쉬고 계신 그런 분들도 계신 듯합니다.

어깨 너머로나마 몇몇 정토마을 손님인 암 말기 환자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가족들도 현대 의학도, 어찌 보면 당사자인 당신도 이젠 포기해 버렸을지도 모르는 생명들입니다. 그런데 그 분들의 표정은 의외로 맑고 평온해 보였습니다. 그렇게 평온한 마음으로 정토마을에 머물다 임종을 하시면 유가족에게 인계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한 때 `암`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를 받고 갈등하고 괴로워도 했겠지만 지금은 당신을 보살피는 호스피스들이 나누어 주는 영혼의 양분을 받으며 평온함을 찾으신 듯했습니다. 자칫 공포 속에 처참한 모습으로 맞아들여야 할 생의 종지부, 죽음이란 것을 덤덤하게 맞아  들일 수 있도록 영혼의 양즙을 나누어주고 있는, 아름답고 거룩해 보이는 호스피스들이 일구고 있는 `죽음의 복`을 조금씩 나누고 계신 듯하였습니다.

▲ 상주해 있는 의료진들이 정성스레 손님들의 상태를 꼼꼼히 점검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일반병동에 계시다 중환자실로 옮겨지면 그곳에서 임종을 맞는다고 하였습니다. 손님은 창밖에 와있는 봄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뿐입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만이 생활하는 곳이라 음습하고 왠지 무거운 분위기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조용하고 깔끔하고 잘 정돈된 그런 병상과 다름없었습니다. 화사한 봄볕에 드러난 바깥 풍경과 조화를 이룬 건물들은 흡사 풍치 좋은 곳에 자리한 별장 같은 그런 분위기입니다.

정토마을은 비구니 능행 스님을 위시해 몇몇 스님들께서 후원자들과 호스피스들의 도움을 받아 운영하고 있는 시설입니다. 스님들을 직접 만나 뵙지는 못했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몸으로 실천하려 고행하듯 수행하듯 하루하루를 부단히 노력하지만 현실이란 게 그렇게 녹록치만은 않은 듯합니다.

`실 가는 데 바늘 가듯` 아무래도 말기의 암 환자들을 돌봐야 하니 필요한 것도 많고 소요되는 것도 많을 겁니다. 그 필요한 모든 것들은 온전히 후원자들과 호스피스들의 봉사에 의존해 이뤄지고 운영됩니다. 우리 주변엔 남을 위해 이런저런 도움을 주고 계신 분들이 참말 많습니다.

▲ 손님들의 간절하면서도 소박한 그렇지만 아주 커다란 바램이 있다면 봄 햇살 속에 드러난 창 밖 풍경을 힘껏 걷고 싶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느 곳이고 비슷하겠지만 정토마을도 넉넉하지 못한 살림이기에 이를 지켜보는 호스피스들과 많은 후원자들은 그들의 부족함을 안타까워하며 많은 사람들이 마음나누기에 동참해 줄 것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일요일인 18일에는 인터넷카페에서만 만날 수 있었던 불교호스피스연합회 동호회원들이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 대하는 행사를 정토마을에서 가졌습니다. 선뜻 찾아온 여름 만큼이나 따뜻한 봄날 이들의 얼굴과 대화는 주변을 장식한 어떤 꽃보다도 아름답고 향기로웠습니다.

▲ 처음으로 얼굴을 대하는 호스피스동호회원들은 이날도 염주알을 꿰듯 복 짓기를 거르지 않았습니다.

제가 진정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생과 사의 기로에 선 사람들을 위해 마련한 이승과 저승의 간이역인 정토마을에서 잠시 머물고 계신 먼 여정의 손님들이 외롭지 않도록 손이라도 흔들어 주는 따뜻함을 함께 나누어주면 좋겠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베풀어 주는 작은 관심과 성의는 간이역 정토마을을 떠나야 하는 그 분들이 갈구하는 마지막 `복`을 일구는데 양분이 되고 기둥이 될 겁니다. 그리고 그 분들이 남기고 간 복의 흔적은 결국 우리들에게 행복이란 모습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정토마을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http://cafe.daum.net/BHU 또는 http://www.jungtoh.com 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우363-873 충북 청원군 미원면 대신리 산 17-1  Tel. 043)298-2258  Fax. 043)298-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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