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술잔

2012.03.22 22:30

mumunsaadmin 조회 수:17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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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196
제목 : 작은 술잔
이름 : 각산()
등록일 : 2007년 02월 18일    조회수 :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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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술잔은 한국인의 술잔보다 대체로 작다.  한국인은 술에 잘 취하고 또 술주정을 부리는 사람이 많다. 그 뿐인가 몸을 해쳐 고생 하는 사람도 많다.  그것은 우리 한국인의 음주 문화의 한 단면을 말해 주는 것 같다.

오래전 일본에서 살 때의 일이다.  잘 아는 일본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집에 한 번 놀러 오라고 몇 차례 졸라 데서 하루는 다른 한국 친구 한 사람과 그 일본인 집을  방문 했다.  손님이 왔다고 안주 약간과 양주 한 병을 내 왔는데 우리 둘이서 짧은 시간에 한 병을  다  마셔 버렸다.  그 때는 젊었고 여간 술을 많이 마셔도 별 탈이 없을 때였다.  아마도 그때는 술의 참 맛도 모르던 시절 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날 이후로 그 일본인 친구는 다시는 내게 놀러 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 친구는 양주 두 병을 가지고 일 년 동안 손님을 치른다는 거였다.  그런데 그날 저녁으로 한 병을 다 마셔버렸으니 그 친구 일 년 예산이 차질이 생겨 버린 게 아닌가.  나중에 생각하니 여간 미안한 게 아니었다.  .

한국사람 같으면 흔한 일이나 일본 사람들은 뭐든지 절약 하는 버릇이 몸에 배여 있다. 그것도 동경 올림픽 전의 일본은 지금과 같이 윤택한 시절이 아니었기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일본의 정종 잔은 지금도 전통적으로 자그마하다. 정종 한 되짜리 병이면 몇 명이서 밤을 새워 마셔도 한 병을 다 비우지 못한다고 한다. 처음에 일본에 갔을 때는 술잔이 작은 것을 불평 하곤 했다.  그래서 나에게는  종종 큰 컵을 주곤 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보니 술잔이 적은 것에는 일리가 있었고 나도 이해가 되었다.  술 마시는 것은 술 자체를 마시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술은 단지 매체일 뿐, 술 을 마시며 나누는 호탕한 대화와 오가는 마음으로 친구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자 하는데 있다.

우리는 술버릇은 어떠한가?  빨리 마시고 빨리 취해버리고 원래의 만나고자 했던 목적과는 다른 결과를 초래 하는 일이 종종 있다.  술잔이 작으면 여간해서 취하지 않는다.  정신을 잃을 일도 없다. 밤새도록 대화를 해도 몸을 상하는 일도 없다.  그 것이 술을 마시고자 했던 참 목적이 아니겠는지?   그렇다면 일본 사람들의 작은 술잔이 정석 인 것 이다.  그들도 맥주잔은 우리와 같은 크기다. 맥주잔이 큰 것은 쉽게 취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대범 하다고 한다. 대범한 것을 탓할 수야 없지만  좀  합리적 이었으면 좋겠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작은 술 잔에 술을 따라 마시듯이 술 마시는 일에 정신을 팔지 말고 술을 마시면서 얻고자 하는 분위기와 좋은 결과를 기대 한다면 일을 그르치는 경우는 없을 것 이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이루려 하지 말고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접근 하는 것이 작은 술 잔의 철학이 아닌가한다.  일본 사람은 손님이 오면 양갱 한 개로 손님 열 사람에게 대접한다고 한다.  한국사람 같으면 양갱 하나면 혼자 다 먹어 치울 것이다.  이것도 작은 술잔 과 같은 이치이다.  다른 이와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서 음식은 배를 불리는 것이 목적일 수도 있지만 그 보다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의 의식일 뿐이고 한 자리에 앉아 화목 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일 수 있다.  이를테면 한 형태의 다 도(茶 道) 와 같을 수 있다.  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음식을 이런 식으로 설명 하면 너무 비약 일지 모르나 적어도 바르게 살고자 하는 우리사회에서는 지켜야 할  상식이 아닐까한다.

일본의 여러 곳을 다녀 보면 작은 술잔 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들어 지방에 따라서는 특산품으로 팔기도 한다.  이 술잔을 수집 하는 사람도 많다.  음식 못지않게 음식을 담는 그릇이 중요 하듯, 술잔도 마찬가지다  어떤 잔에 술을 따랐는지 그것에 따라 술 마시는 분위기가  달아 진다.  고운 잔에 술을 따라 마시면 마치 예쁜 아가씨가 옆에 있는 것 과 같다.

일본의 음식 문화만 그런 것이 아니다.  불란서의 음식도 그러하다.  음식은 음식을 담은 그릇과 음식의 재료와 양 그리고 색깔까지 조화를 이룬다.  음식의 색깔 배열 그리고 그릇 등을  음미 하면서 식사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음식을 하나의 예술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끼니를 해결하기 위한 식사는 그렇게 많은 신경을 쓰지 않아도 상관이 없겠지만 여러 사람이 모여서 식사 하는 것이나 친구나 손님을 초대해서 하는 술이나 식사는 근본 적으로 하나의 의식처럼 치르고 있다.

술을 잘 마신다는 참뜻은 취하기 쉬운 것을 취하지 않고 마신다는데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술잔은 클 필요가 없고 비록 잔이 크다 하더라도 술을 가득 채울 필요는 없는 것이다.  욕심 내지 않은 것, 한 번에 모든 걸 해결하려 하지 않은 것이 작은 술잔의 미학이 아닌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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